#최태성 #다산초당 #2019
큰별 쌤
신기하고 반가운 일이 생겼다. 별 생각 없이 집어 든 책 표지에 아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큰별 쌤을 여기서 만나다니! 무척 반가웠다.😄 예전에 감명 깊게 본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는데, 주변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이미지의 역사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또한 저자의 EBS 한국사 강의는 누적 수강생이 500만 명을 넘길 정도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이회영 선생의 독립운동과 행적을 강의하실 때 모습은 특히 인상 깊어서 요즘에도 종종 찾아보기도 한다. 생각해보니 그때의 강의 내용도 지금 말하려는 『역사의 쓸모』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책은 [1장]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 [2장] 역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3장]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4장]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4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읽고 나면 잊어버리는 연혁과 인물, 유적지 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 속 인물의 삶을 대하는 태도, 그 사람들이 시대를 바라보는 철학, 역사적 선택의 갈림길에 작용하는 선조들의 가치관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통해 현재의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가 책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이다. 책의 문체도 동네 아는 형처럼 친숙하다. 책을 읽는 내내 큰별쌤의 강의하는 표정과 몸짓 억양 등이 연상될 정도로 재미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가볍지만은 않다.
역사와 나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몸소 겪은 한국인(?)이라면 역사를 성적을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하는 귀찮은 암기과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부끄럽게도 나또한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한 암기과목이 아니다. 인생에 꼭 필요한 지혜의 보고(寶庫)이며, 공부하면 할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재미있는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였다. 오래전에 방송된 것이라 방영 당시는 보지 못하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 강의 때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 속 인물은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되었다. 나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던 역사를 다르게 바라보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도올 선생의 강의를 통해서 삼봉(三峯, 정도전의 호) 정도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알려지지 않았던 정도전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강의의 주제이자 목적이었다.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최후의 고려인 정몽주, 최초의 조선인 정도전’이라는 주제였다. 삼봉과 포은(圃隱, 정몽주의 호) 정몽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비교하는 것이었는데, 강의의 내용은 나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고 그동안 생각지도 못한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삼봉(三峯)과 포은(圃隱)
강의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시작한다. “여러분 정몽주가 더 좋아요? 정도전이 더 좋아요?”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청중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면 정몽주가 사랑받고 있는 만큼 정도전도 그러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라고 다시 묻자, “그건 아니요.”라고 여기저기서 대답한다. 모니터 밖에 나도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고려의 절개와 충신의 대명사 정몽주와 잘 모르는 정도전은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나에게도 강의를 듣기 전라면 대답은 너무 쉬웠다. 하지만 이어지는 강의 내용은 나를 점점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도전이 살았던 고려말 상황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그때도 역시나 부패한 지배층은 힘없는 백성들을 착취했고, 개혁 성향의 공민왕마저 부인인 노국공주와 사별하면서 고려의 국정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도전은 오랜 유배 생활로 서민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관리들의 횡포는 날이 갈 수록 심해지고 이 때문에 먹지 못해 죽어 나가는 수많은 백성을 보면서 삼봉은 고려를 개혁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제도와 비전을 겸비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고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결국 조선건국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조선건국 과정에서 정도전을 이끌었던 선배이자 고려에서 같이 공직생활을 했던 동료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까지는 찬성했지만, 고려를 버리고 조선을 세우자는 정도전의 생각에 반기를 든다. 정몽주의 유명한 단심가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역사의 평가
대한민국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는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조선의 건국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은 결국 조선에 있다. 유학을 근본으로 새로운 문명을 건국한 조선왕조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역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지만 고려,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려와 조선의 관계도 생각해보자. 고려의 입장에서 정몽주는 충신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역모를 꿈꾼 반역자이다. 한편 새롭게 건국한 조선의 입장에서 정도전은 개국공신이지만 정몽주는 역적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두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리의 예상과는 매우 다르다.
고려의 부패와 부조리때문에 탄생하게된 조선. 그러한 조선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개혁과 고정관념 탈피를 외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정도전이 아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단심가를 부르며 충성을 맹세하는 정몽주같은 신하가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의 설계자라고 할 수 있는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가혹할 만큼 냉혹하지만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단심가를 정도전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역사를 통해 배운다
역사는 배신과 충성처럼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면 그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고려말과 조선건국의 역사를 알아가면서 역사의 역설과 아이러니와 오묘함을 느꼈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과 그들이 마주했을 상황들을 상상할수록 더욱 몰입하게 되고 현재를 살아가는 내 모습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암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늦었지만 알게 되었다.
역사를 공부하면 삶을 배울 수 있다. 역사를 시험을 위한 수단 정도로 취급하면 하기 싫고 불필요한 것이 되지만, 나의 고민을 같이 고민해주는 스승님이라고 생각하면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소중한 대상이 된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삶의 지혜를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게 물어보면 해답을 들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혁신, 성찰, 협상, 창조, 합리, 공감, 소통은 우리가 늘 고민하는 주제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답을 찾겠지만, 역사를 통해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훌륭한 접근이다.
자신의 멘토를 역사 속 인물로 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이 존경하는 역사 속 인물이 보여주는 삶을 바라보며 지혜를 얻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나가는 것, 어쩌면 이것이 역사를 배우는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뿐인 인생을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처럼 뜻깊게 살아보려 노력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