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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점은 태 켈러(Tae Keller) 작가의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특별함이 책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것이다. 심각한 병을 진단받은 우리 할머니, 엄마와 나 그리고 언니는 할머니 집에서 치료차 머물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겪는 일들이 책의 전체 줄거리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설화의 힘’, ‘정체성의 성찰’, ‘가족의 발견’ 등의 익숙하지만 그립고 정겨운 감정이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치매를 겪는 가족의 안타까운 현실과 호랑이와 만나서 할머니의 과거와 나의 정체성을 깨닫는 ‘현실 같은 상상’은 서로 대비되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있어서 꿈같이 몽롱하고 묘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성장’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지나는 과정은 꿈처럼 애매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그런 경험들로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다. 복잡미묘했던 순간들이 새롭게 다가오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성장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도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꿈과 상상 그리고 현실의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상상 속에서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하고, 현실에서 염원했던 일들이 꿈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흔했다. 어쩌면 꿈과 상상과 현실의 구분이 명확해지면서 철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자아의 성장은 이렇게 내 주변의 경계선을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나아져? 슬픔이 가셔?”

내가 묻자 언니는 앞을 빤히 보며 대답한다.

“슬픔은 희미해져. 응, 결국에는, 그런데 그리움은…… 시간이 지난다고 없어질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

이 책의 전체 서사는 화자이자 주인공 릴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국계 미국인인 저자의 고민이 릴리에게 투영되지 않았다고 보기 힘들다. 정체성이란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에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이때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각 국가의 설화이기도 하다. 이렇게 호랑이 설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과정을 저자도 현실에서 직접 경험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아름답고 따뜻한 문체와 문장으로 승화시켰다는 의미에서 읽어볼 근거는 충분하다.

책에서 등장하는 ‘호랑이’는 여러 상징적인 의미들이 겹쳐있다고 생각하다. 심리적인 두려움, 사나운 짐승, 신화의 주인공과 같은 표면적인 느낌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한국인의 정체성’, ‘이야기의 힘’, ‘여성의 강인함’, ‘자아 성찰의 기제’ 등 보다 중의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인 릴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할머니와 나누는 대화는 이 책의 ‘백미’이다.

성장에 관한 이야기인지, 이민 2세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가족에 관한 이야기인지 독자의 시선에 따라 이 책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 우리의 인생도 순차적으로 직렬연결 방식의 1차원 방정식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과 과정이 복잡하게 얽히고 섞인 고차원 방정식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장과 정체성, 친구와 가족, 삶과 죽음은 따로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변하고 발전하고, 결국 이런 과정이 인생이 된다. 릴리의 이야기가 내 과거 이야기처럼 친근하고 진실성 있게 들리는 이유는 아마 이런 것 때문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또 다른 해답을 찾고 있다면,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거나 용기가 부족하다면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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