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애 역사 단편들
잠들기가 아까울 정도로 선선한 가을밤이면, 그런 밤에만 느끼는 상쾌한 기분을 나의 상념은 시샘이라도 하는지 옛 연인과의 아프고 아련한 추억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잠깐 스쳤지만 오래도록 기억되는 인연에서 영원처럼 느껴지는 지겹고 지독한 인연까지 모두 결국엔 우리에게 무언가를 남기게 된다. 그러한 ‘흔적들’을 자양분 삼아 우리는 조금씩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항해해 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연애도 결국 ‘인간관계’라는 큰 카테고리에 포함할 수 있다. 그리고 연애를 통해 성장한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통용되는 말일 것이다. 더 착잡한 것은 그러한 연애의 결말이 실패에 가까울수록 ‘성장’의 폭과 깊이가 더해진다는 사실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알았을 때,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일의 연인들』은 이처럼 슬프고 아련하지만 성장하게 되는 연인들의 소소한 이야기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특별하고 비범한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루고 싶은 낭만이다. 누구의 글이든 평범하지 못하면 나와 관계없다는 이유로, 비범하지 못하면 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읽을 만한 글을 쓴다는 건 평범과 비범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각이 필요한 줄타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려울 걸 정영수 작가는 어느 정도 해냈다.
왠지 그 밤은 영영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그것은 내게 앞으로 다가오거나 다가오지 않을 무수히 많은 행복한 시간들과 외로운 시간들의 징후처럼 느껴졌다. 나는 비스듬히 누운 채 아직 잠들지 않았을 지원의 윤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그들의 유령들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저자의 생생하고 현실적인 문체가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이런 추억으로 이끈다. 연애의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듣거나, 했을 법한 평범하고 친근한 대화를 유려한 문장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그런 대화가 이끄는 주제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그리고 나의 과거를 자꾸 돌이켜보게 한다. 기억의 저편, 삶에 치여 잊고 있었던 추억을 다시 대면하면, 막연히 아름답고 아련했으리란 기대와는 다르게 지질한 아집으로 똘똘 뭉친 과거의 내가 있다. ‘후회’는 이런 감정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책은 정영수 작가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등장인물도 서사도 각각 다른 작품이지만, 무엇인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모든 작품이 ‘연애와 성장’라는 키워드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애와 성장은 동일한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이다. 물리학 법칙 같은 이 말은 절묘하게 이 책의 주제를 파고든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연애를 경험하고, 연애를 통해 성장한다. 행복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줄 알게 되고, 나와 다른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해본다. 고민과 노력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만남과 이별의 과정에서 겪는 수많은 경험과 감정은 성장의 원동력이자 연애 그 자체이다.
이런 과정을 연애와 성장이란 단어를 제외하고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성장과 연애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변증법적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감성적으로 느껴야 할 소설을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접근했지만,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이제 정말 가을은 가버렸다. 쌀쌀맞은 겨울의 투정으로 가을의 끝자락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내일의 연인들』로 그 그리움을 달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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