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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기록

이번에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임진왜란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실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무턱대고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일기라는 것이 원래 개인적인 일상의 기록이다 보니 글을 쓴 당사자가 아니면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어려운 한자와 고어의 빈번한 사용은 이해의 난이도를 더욱 가중한다. 충무공의 소중한 기록들을 글자 그대로 읽기만 한다면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잘 읽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서 추측하고 비교하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배우게 된 것이 많았다. 주변국들과의 관계, 조선 수군의 조직체계, 이순신 주변 인물과 성장 배경,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등의 종합적인 정보를 이해하고 난중일기를 읽어야 그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언을 몸소 겪게 해 준 난중일기는 그래서 충무공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험한 소굴에 진지를 구축한 적이라 경솔히 나아가 칠 수 없음은 물론,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간 이순신

성웅으로 추앙받는 충무공은 영웅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자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자식이었다. 또한 성공을 꿈꾸는 성실한 공무원이었으며 수군 내에서는 부하들을 관리해야 하는 상관이었고 전쟁을 치르는 장군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에 세수를 하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에 대해 점을 쳤다. ‘중이 환속하는 것 같다如僧還俗’는 괘를 얻어서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如疑得善’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으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정이 많아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이웃들의 아픔을 나눌 줄 아는 훌륭한 어른이었다. 이처럼 난중일기 곳곳에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충무공의 모습이 담겨있다. 우리와 매우 비슷한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업적은 더욱 위대하고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영의정 유성룡의 편지도 가져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고 애쓰는 일을 들으니, 그 강직한 마음과 그리움이 끝이 없었다.

애국충절의 표상

충무공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애국자가 되어있다. 아마도 순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국가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 나도 모르게 감화된것 같다. 개인적인 고통보다는 항상 대의와 정의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충무공의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날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벌써 생사가 바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다른 일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으랴. 세 아들,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죽음마저 숭고한 성웅

노량해전은 기나긴 7년의 침략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중요한 해전이지만 충무공이 전사한 안타까운 해전이기도 하다. 성웅 이순신도 평범한 우리처럼 번민했었다.

9일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심란했다. 무슨 말로 형언하랴. 가슴이 막막하고 취한 듯, 꿈속인 듯, 정신이 몽롱한 게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늘 스스로 성찰하고 기록하면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충무공의 이러한 숭고한 정신은 전쟁의 두려움마저 임진왜란의 승리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하였고, 또 이르되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이순신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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