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분 소요

삶의 이유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은 카뮈의 철학적 기조인 ‘실존주의’를 보여주는 동전의 양면 같은 두 작품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사형수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한다. 사실 우리도 뫼르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회사를 가기 위해 잠을 휘적휘적 물리치며 하루는 시작된다. 대중교통에 몸을 맡긴 채 좀비처럼 출근한다. 이어지는 뻔한 회의와 지겨운 메일 확인, 꾸역꾸역 먹을 것을 입에 집어넣고 몽롱한 오후가 지나면 습관적인 퇴근, 시답지 않은 TV로 시간을 보내다가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아침, 이런 하루하루가 쌓여 오늘이 됐다.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순간이 아니면 대부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진실은 ‘인간의 생명은 한계가 있다.’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피조물일 뿐이다. 어차피 죽을 운명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시시포스 신화

알베르 카뮈의 대답을 듣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다시 말해 책의 제목을 ‘시지프 신화’로 지정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시지프 신화의 서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추가정보: 시시포스(고대 그리스어: Σίσυφος[‘sɪsɪfəs], 라틴어: Sisyph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시시포스, 시지푸스, 시지프스, 시지프 등으로 표기하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

코린토스의 왕인 시시포스는 우연히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딸을 찾아 헤매던 아소포스가 코린토스에 들르자 시시포스는 그에게 메마른 성채에 샘이 솟게 해주는 조건으로 딸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시시포스의 고자질에 분노한 제우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내 그를 지하세계로 끌고 오도록 했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기지를 발휘해서 타나토스를 제압한 뒤 쇠사슬로 묶어버렸다. 죽음의 신이 활동을 못하게 되자 세상에서는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았다. 세상의 질서가 흐트러질 것을 우려한 제우스가 서둘러 전쟁의 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해주도록 했다. 그러자 사슬에서 풀려난 타나토스가 제일 먼저 지하세계로 데려왔던 혼령이 바로 시시포스였다.

그러나 교활한 시시포스는 타나토스에 잡혀 지하세계로 끌려가기 전 아내에게 미리 자신의 장례를 치루지 말고 시신을 저잣거리에 버려두라고 단단히 일렀다. 자신이 시킨 대로만 하면 다시 살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후 타나토스에 의해 지하세계로 잡혀간 시시포스는 하데스에게 지상을 가리키며 자신의 시신을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 둔 아내를 원망하며 사흘만 말미를 주면 아내를 혼내주고 자신의 시신도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겠다고 간청했다. 그를 불쌍하게 생각한 하데스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건만 지상으로 돌아간 시시포스는 예상대로 지하세계로 돌아오지 않고 꽁꽁 숨어버렸다.

제우스는 결국 자신의 전령 헤르메스를 지상으로 보내 시시포스를 찾아 지하세계로 끌고 와서는 끔찍한 형벌을 내렸다. 그때부터 시시포스는 지하세계의 어떤 높은 산기슭에서 커다랗고 둥근 바위 하나를 그 산 정상까지 굴려 올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시시포스가 낑낑대며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자마자 바위는 다시 산 밑으로 저절로 굴러떨어졌다. 그러면 시시포스는 터벅터벅 산 밑으로 내려와 다시 바위를 정상으로 굴려야 했으며, 시시포스가 정상에 다시 힘들여 올린 바위는 다시 밑으로 떨어져 그의 노역은 절대 끝이 나지 않은 채 영원히 계속되어야 했다.

시지프 신화

부조리

의미 없는 하루하루, 결국 죽기 위해 달려가는 우리는 산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시지프의 모습과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그러면 이제 카뮈의 대답을 들어보자.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부조리의 논리적 결론은 결코 '자살'이 아니다.

습관을 멈출 때(사형수가 됐을 때, 인생의 결론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부조리’를 경험한다. 한정된 생명이라는 벽과 마주치는 경험, 이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가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렸지만, 다시 심연으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내려다보는 순간과 유사하다.

하지만 ‘부조리’는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다. 그리고 부조리의 경험은 ‘왜 나의 삶이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된다.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 성찰은 ‘자살’과 ‘희망’ 같은 포기와 합리화로 귀결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부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열정과 반항’이 제대로 된 결론이며 열정적인 반항은 결국 진정한 ‘인간의 자유’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마치 바위를 다시 정상으로 올려놓기 위해 담담하게 산에서 내려가는 시지프의 뒷모습처럼.

불편한 진실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인가 깨닫게 된다. 이 순간 자체가 바로 ‘부조리’인 것이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갈수록 죽음은 다가온다. 나의 감정은 이러한 무기력한 상황이 조급하고 안타깝지만,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나에게 무관심하고 평범하다. 벽처럼 느껴지는 세상과 나의 관계는 부조리한 관계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조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조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열정적으로 ‘반항’해야 한다는 것이 카뮈의 대답이다.

열정과 반항

카뮈의 대답은 강력하며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는 것과 같은 진실은 피할수록 자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별생각 없이 살아가는 이유도 나와 세상의 부조리를 똑바로 바라보기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고뇌를 극복하지 못한 극단적인 선택인 ‘자살’도 결국 이러한 부조리를 외면하려는 행위의 일종이다.

여기서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부조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결말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시지프가 바위보다 강인할 수 있는 이유는 바닥으로 떨어진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기 위해 산에서 내려가는 ‘열정과 반항’이다.

바위가 심연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결말이 아닌 시작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세상의 부조리보다 강인해진다. 연극, 개척, 예술작품과 같은 가치 있는 창조물(카뮈도 이러한 예를 들었다)은 이러한 열정적인 반항의 결과물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 세대와 세대를 넘어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이유 ‘반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의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편헙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을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 정답은 고사하고 질문의 존재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인생이다. 『시지프 신화』는 이런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평소에 습관처럼 반복되는 생활로 타성에 막힌 틀에 빠져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힘을 카뮈의 질문에서 얻게 될 것이다.

댓글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