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로마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였던 피렌체. 그곳의 실무 외교관이 쓴 자기소개서 정도의 팸플릿은 지구 반대편의 거리와 5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지도자에 의한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했다. 정치를 종교와 윤리에서 분리한 최초의 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그의 『군주론』으로 정치는 고대와 중세를 넘어 근대로 전환되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선의 이데아를 이상향으로 하는 정의 국가를 말하면서 철학자들이 정치의 지도자가 되는 ‘철인 정치’를 이상적인 국가(정확히는 폴리스)로 보았다. 실제로 그의 꿈을 구현하고자 시라쿠스(현재의 시칠리아섬)에서 자신의 이론을 구체화해줄 참주(디오니시우스 2세)를 교화하려고 했지만, 현실과의 괴리로 실패하게 되고 아카데미아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매진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과 로마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 약 1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탈리아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영광을 뒤로하고 여러 군소 도시국가로 사분오열되었다. 특히 마키아벨리의 고향인 피렌체는 스페인, 프랑스와 같이 체계화된 정부조직도 미비했으며 황제나 교황 세력 같은 군사력 또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주변 세력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또한 마키아벨리 개인적으로도 외교관으로 임관하며 풍운의 꿈을 꾸었지만 결국 내란의 물결에 휩쓸려 외교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 한 체 반역죄의 누명을 쓰며 투옥과 유배 생활을 전전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자신의 개인적인 활로와 피렌체(이탈리아)의 부흥을 꿈꾸며 와신상담으로 저작한 책이 『군주론』이다.
현실을 위해 이상은 적당히 타협하라는 식의 비루한 철학 정도로 이 책을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불편해도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냉철하게 대처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도자라면 이런 ‘불편한 진실’을 윤리적 부담을 이유로 절대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이해하였다.
역량(Virtú)
군주는 모든 성품들을 실제로 갖출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갖춘 듯 보이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시대정신(Necessità)
자신의 힘에 근거하지 않은 명성과 권력처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은 없다.
운명(Fortuna)
단지 “많은 땀을 흘릴 필요가 없고 운명(sorte)이 좌우하도록 내버려 두자”는 결정론에 사로잡혀인 지식인들은 비난의 대상일 뿐이다. 운명의 여신을 뜻하는 포르투나(fortuna)가 ‘행운을 가져오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듯이, 운명을 ‘숙명’(sorte)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플라톤처럼 이상적이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국가’ 혹은 ‘정치체제’를 설명하려 했던 기존의 정치철학은 마키아벨리가 사는 피렌체의 정치 상황에는 적용할 수 없었다. 기독교적 윤리관과 종교적인 이상보다는 현실적이고 인간의 내면을 더욱 솔직히 이야기하는 정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플라톤의 『국가』보다 직설적인 조언을 책에 담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군주를 향한 냉혹한 조언들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정의로움과 공정함을 교육받지만 언제나 구차한 합리화로 부정하고 부조리한 선택을 하게 되는 인간의 허위의식에 마키아벨리는 통렬한 돌직구로 응수한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에 덜 주저합니다.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원한은 악행뿐 아니라 선행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현실적이라 불편하고 마키아벨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 하기는 힘들지만 어찌 보면 냉철하고 정확한 ‘진실’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돌직구는 계속된다.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행하지 않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입니다.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의 핵심을 압축시킨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군주론』 전체에서 마키아 밸리는 인간을 변화가 불가능한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과 여건에 따라 변화무쌍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유동성’의 의미를 인지하고 이에 능숙한 군주가 필요하다 본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비록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처럼 역사에 등장한 영웅들(특히 로마)의 장점을 모방하고 단점을 보완해서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는 군주를 위한 진지한 조언이 담긴 것이 바로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서양의 정치학을 윤리학에서 분리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다시 말해 『군주론』은 미래의 시대정신을 내다본 정치적 지동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리더들을 향한 현실적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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